본문 바로가기
여행

양주 회암사 지공선사 부도비 - 양주회암사지공선사 부도, 회암사지공선사 승강장에서 보는 조선전기부도의 특징

by serenday 2025. 3. 24.
반응형

양주 회암사 지공선사 부도비

 

 

지공선사(?1361)는 인도 승려로 19세에 인도를 떠나 중국에 왔다. 이후 1326년부터 2년간 고려에 머물며 다시 태어난 부처로 극단적인 환대를 받으며 그와 관련된 기록은 고려시대 문헌과 조선전기 지리지에서 찾을 수 있다. 지공은 고려를 방문한 후 1328년 연경으로 돌아와 법원에 머물렀다. 나영과 백운, 무학 등이 원국에 유학하러 갔을 때, 지공의 문하에서 수학하기도 했다. 여기서 백운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세계에서 처음으로 금속 활자의 간행물인 백운 이미지 녹부직지 지짐체절의 주인공인 백운 이미지다. 지공은 1361년에 입적했지만, 그의 입적은 1367년의 고려로 알려져 있었지만, 1372년(공민왕 21) 왕명으로 그의 샐리를 회암사에 부도를 세워 안치한다. 이런 내용은 이색의 목은 집의 서천 제납박 타존자 부도명에 그 기록이 남아 있다. 당시 회암사는 그의 제자인 나영 이미지가 잘 알려져 있고 고려에서 가장 중요시한 사원이었기 때문에 그의 부도를 세운 것 같다. 지공 사리는 양주회암사와 장단화장사(북한), 묘향산 안심사(북한)로 나뉘어 안치됐다. 지공 선사의 부도는 한국에 존재하는 최초의 분사 부도로서 그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다. 회암사의 지공선사부도는 탑신이 구형으로, 화장사 지공 선사부도는 석종형으로, 각각의 형태는 다르다.

 

회암사지공 선사부도와 석등은 나연 선사부도가 서 있는 언덕 아래에서 50m 정도 떨어져 있으며 무도, 석상, 돌 등을 남북 일직선 위에 나란히 배치했다. 위 사진 속 계단 끝에 나연 선사의 부도와 돌 등이 위치하고 있다. 무술은 팔각지 대석 위에 상·중·하대 기단을 두었다.

 

탑 신부와 상륜부도 완전히 남아 있으며 표면에는 아무 조각도 없다. 무도의 지대석은 석재 2장을 이용하여 팔각형으로 하고, 그 위에 4장의 돌로 기단하대석을 팔각형으로 표현했다. 기단 속에서 대석은 중앙이 볼록한 팔각으로 측면을 둥글게 정돈했다.

 

톱신은 둥글고 넓은 형상으로, 상하는 평평하다. 지붕석은 팔각이며 기울기가 가파르고 폭이 좁고 마치 삿포로처럼 보입니다.

 

지붕석에는 이전 시기의 부도로 표현한 기와트 골의 표현이 없고, 합각 바닥은 굵은 선으로밖에 나타내지 않았다. 상륜부의 노반은 팔각인데 2단으로 구성하고, 3단의 보륜을 더해 장식했다. 정상에는 예쁜 모습의 보주를 얹어 표현했다.

 

회암 사지에 있는 고려말에서 조선 전기구형 부도의 주인공인 지공, 나영, 무학대사로 이어지는 스님들의 행위를 간단히 살펴보았다. 고려 말기가 되면 불교는 지공과 같은 외국 선수들의 영향으로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조계종계 선승을 중심으로 불교계 심야운동이 진행되어 승려와 유신들과의 교류도 풍부하게 진행된 시기였다. 지공은 인도의 승려로 중국에 머물며 부터 까지 2년간 고려를 방문해 한국 선사에 새로운 영향을 미쳤다. 나연과 백운, 무학 등에 가르침을 전해 그들의 사상에 영향을 주었다. 지공은 특히 계율에 대한 철저한 실천을 강조하고, 그 밖에도 좌선이나 설법 등 인도 본래의 근본불교의 다양한 수행을 강조했다.

 

반응형